아리랑의 역사
사람으로 치자면, 아리랑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에 해당한다. 전통사회 산촌마을 아낙과 남정네들의 곁에 머물던 아리랑이 19세기 중반 경복궁 중건 때 사당패에 이끌려 도회지로 나온 뒤,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먼저 향촌사회를 나와 도회지의 대중문화로 변신하면서 아리랑은 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아리랑 사랑의 처음은 경복궁 중건에 동원된 노무자들 사이에 일어났지만, 어느덧 궁중의 왕과 왕비, 그리고 궁녀들에게까지 이어지고, 나아가 도성 한양을 넘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산촌문화 아리랑이 도시 대중문화로 자리 잡으며, 강한 힘을 획득한 것이다.
내친 김에 아리랑의 의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보자. 대중문화의 강자가 되면서 아리랑은 활동반경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다른 분야에서 일종의 업무 제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나운규가 아리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 <아리랑>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시, 소설, 연극, 무용, 각종 상호 등으로, 그리고 유행가와 신민요 등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르로 아리랑의 점유공간이 자꾸만 늘어났다. 그런가하면, 일제강점기 시대환경과 맞물려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곧 <서울아리랑>을 사람들이 가슴으로 받아들여 부르면서 대중의 아리랑 사랑은 선호의 단계를 넘어 충성의 단계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아리랑에 대한 충성은 어느덧 대중의 범주를 넘어서 민족성원 모두가 동참하고 있었다. 민족성원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아리랑의 문화권력이 창출된 것이다.
아리랑의 권력은 견고하여 강한 지속력을 보였다. 아리랑을 기리며, 아리랑에 대한 사랑과 충심을 형상하는 작업이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문화영역에서 이어지고 있다. 아리랑이 축제가 되고, 사진, 회화, 서예 등 시각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흐름의 결과이다. 아리랑의 활동공간이 거의 전방위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리랑은 사회적으로도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감당해주었다. 월드컵축구대회가 있을 때마다 응원가가 되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에게 온 국민의 마음을 모아주었고, 남과 북이 단일팀을 이룰 때는 단가가 되어 둘이 하나 됨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또 근래 창원의 이주노동자축제, 화성의 결혼이민자가족축제 등 사회통합을 위한 이벤트에 이름을 내주어 아리랑의 이름으로 행사를 치르게 했다.
여기에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리랑의 업무공간이 글로벌한 범주로 확장된 것이다. 그 동안에도 아리랑은 외국의 여러 음악가들에 의해 국제 활동을 수행해왔지만, 인류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서 수행해야 할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리랑이 글로벌한 행보를 강화하며 또 다른 진화를 보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리랑 자신도 그간의 행보를 돌아보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산촌마을에 머물던 옛날의 아련한 기억과 다른 존재가 견줄 수 없는 문화권력을 이룬 현재의 위상이 맞물리면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아리랑의 역사적 행로와 노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