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아리랑
한국영화의 신화, 민족영화 <아리랑>
무엇보다 192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과 같은 민족영화가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확립된 시기로 《아리랑》은 항일 저항정신을 집약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민중은 이 작품에 열광하여 나라 잃은 겨레의 울분을 풀었으며, 마치 ‘아리랑’은 애국가처럼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영화《아리랑》
우리나라 영화의 큰 태동을 알린 영화가 《아리랑》이다. 영화 《아리랑》은 부산 소재 영화사 조선키네마사가 제작하고 나운규가 감독, 주연, 시나리오, 각색을 맡아 개봉한 35m 무성영화(전 9권)이다. 1926년 4월 말, 안암동(안암골)에서 처음 촬영을 했다. 당시 기와집 한 채와 초가집 십여 채가 있는 산중 골짜기가 배경이 되었다. 제작비 1200원, 촬영 기간 4개월, 필름 9천피드가 사용되었으며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주인공(영진)에 나운규, 여주인공(영희) 신일선, 변사 성동호, 막간 여가수 유경이(劉慶伊)가 참여하여 흥행을 거두었다. 개봉일 새벽, 총독부는 전단지 1만 매에 불온한 가사가 있다고 문제 삼아 모두 압수하는 등 탄압했으나 서울의 15개 극장, 전국 30여개 극장 상영을 시작으로 기록상 1946년까지 서울에서만 800여회나 재상영되었다. 또한 내용 일부가 삭제된 상태이긴 하지만 일본에 수출되고 중국 동포사회와 일본의 조선인 노동 현장 가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서울에 유학 갔다 실성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 영진이가 아버지와 누이동생을 보며 곤경을 겪는 내용이다. 아들의 성공만을 기대하고 사는 아버지와 순박한 누이동생(영희/신일선)이 일제의 토지 수탈로 지주와 그 앞잡이들에게 횡포를 당하는 일상이 구조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와 고양이를 첫 타이틀로 제시하여 조선과 일제의 관계를 현실화하고, 수난의 땅에서는 살 수가 없어 정든 고향 산천을 등지고 북간도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고발했다.
《아리랑》은 감독 나운규의 저항의식이 깃들어 있다. 일제 하 조선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대변하였고,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나의 이야기’로 공감이 되기도 하고, 서로의 공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로 회자되었다.
이런 결과로 1940년대 초 조선 영화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으며, 1960년대 남북 공히 영화 《아리랑》을 ‘민족영화’로 꼽게 되었다.
영화 《아리랑》 주제가
영화 《아리랑》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주제가가 큰 울림을 남겨 오늘에도 전해진다. 주제가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의 테마음악이면서 삽입곡이다. 주제가는 단순히 영화의 시작과 끝에 쓰인 시그널 뮤직 정도가 아니라 서사 전개 과정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관객의 집중력을 높였으며, 영화에 삽입되기 이전부터 전국에서 유행을 하기도 했다. 이후 개봉된 지 12년이 지난 1938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아리랑은 곧 나운규’라는 공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가 전 조선의 방방곡곡을 흐르던 때는 지금부터 13년 전 일이다.
아리랑이라면 라운규씨를 생각하게 되고 라운규씨라 하면 곧 아리랑을 연상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과 동리 사람들에 의해 일부 가사가 네 번 불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인 아리랑 고개에서의 합창은 영화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주었다.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이 포승에 묶여 일본 순사에 호송되어 갈 때, 주인공이 뒤따르는 동리 사람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대신 우리가 함께 부르던 아리랑을 불러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며 대합창이 이루어진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도 따라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영화<아리랑> 작품
- 01 1926년 나운규 감독 제1편<아리랑> 개봉
- 02 1929년 나운규 시나리오 제2편<아리랑>
- 03 1936년 나운규 감독 제3편<아리랑>
- 04 1935년 홍토무 감독 <아리랑고개>
- 05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
- 06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1957)
- 07 최무룡 감독의 ‘나운규의 일생’(1966)
- 08 유현목 감독의 ‘아리랑’(1968)
- 기타 나운규 원작 등 각색 작품
곡조는 나운규가 김영환에게 의뢰하여 편곡(편작)했다. 김영환은 당시 가장 큰 극장 단성사에 소속되어 변사와 감독 및 작사․작곡을 맡은 인물이다. 가사는 본래 총 4절로 구성되었으나 일부는 검열되어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극장에서 상영될 때 새로운 가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전단지에서 문제가 된 가사는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말이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이다. 또다시 이후에 문제가 되었던 가사는 “싸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에다가 불 지르리”가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주제가의 가사는 시기나 극장에 따라서 변경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나운규는 12살에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회청선(회령과 청진 간 철도)의 조선인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가슴에 담았다. 다음은 1937년 잡지《삼천리》에서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담은 내용이다.
기자 曰 :
“한동안은 그것이 벌써 10년은 되었지만, 그때 서울이든 시골이든 어디에서든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부르던 아리랑의 이 주제가를 누가 지었어요?”
나운규 曰 :
“내가 지었소이다.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을 울려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어 보았답니다. (……)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이렇게 영화 주제가로 탄생된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의 감정을 대변하던 민족적인 아리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제가 〈아리랑〉은 음악적 구성면에서 저항성과 통속성을 표방한다. 또한 음악의 기능면에서는 유용하면서도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음악적 변용이 이루어진 시기를 살펴보면, 1930년대 선양(鮮洋)합주, 1950년대 조양(朝洋)합주에 의해 편곡되어 세련미를 확보하면서 대중화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한이나 해외 동포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를 〈서울아리랑〉 또는 〈본조아리랑〉으로 명명하기에 이른다.
영화 <아리랑>포스터
나운규, 감독/주연/시나리오/각색
명동학교 시절 나운규
나운규는 인력, 자본, 대중들의 영화 인식까지 부족한 현실에서 자기희생을 전제한 신념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그는 시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중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인 동시에 시나리오, 주연, 각색까지 맡아 성가를 올렸다. 1925년 첫 출연한 영화 《운영전》, 1926년 《농중조》에 단역으로 출현한 1년의 경험으로 민족의 대표 영화 《아리랑》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민족학교 사민학교를 설립한 부친(나형권)의 가르침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사관학교라 불리던 명동학교(1918)를 다니고, 회령 청진 간 철도를 파괴하는 독립운동 ‘도판부 사건’(무산령 폭파 사건)에 참여하여 일제 검속을 피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후 1921년에 귀국하여 서울 중동학교에 다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과 함흥형무소에서 1년 6개월 형을 살았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어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이후 러시아 백군에 입대하여 용병으로 살았던 경험 등을 토대로 “민족의 비애와 불타오르는 민족정신을 형상한 민족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은 영화로 흥행의 새 기록”을 썼다.(시인 임화)
이후 총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 또는 감독, 시나리오, 각색을 맡아 신명을 다했으나 1937년 36세에 요절하였다. 이로 인해 1940년대 이념적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았고, 해방 후 좌우익 대립과 갈등을 겪지 않았다. 나운규는 영화 작품만으로 평가를 받아 남북 모두에서 “폭력적 압제와 권위에 저항하며 민족적 의식을 고양한 영화인”(남측), “근로인민들의 생활 편편과 그들의 지향과 염원을 진실성 있게 반영할 줄 아는 이”(북측)로 인정받고 있다.
나운규는 아리랑 이후 10년간 《아리랑》 2, 3편과 《풍운아(1926)》, 《들쥐(1927)》,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1929)》 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화미학상으로는 사실적인 작풍을 확립하여 초기 한국영화의 격조 높은 작품세계를 제시하였다. 이는 한국영화의 효시이며, 전통적인 흐름의 초석이 되었다. 따라서 나운규를 민족문화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하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영화 <아리랑 광고면>
영화 아리랑 스틸1
영화 아리랑 스틸2
<나운규 작품과 활동 사항>
나운규 작품과 활동 사항
번호 |
작품 |
년도 |
활동 |
주제가 |
제작사 |
|
바다의 비곡 |
1924 |
출연[어부] |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1 |
운영전 |
1925 |
출연[가마교군꾼] |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2 |
심청전 |
〃 |
출연[심봉사] |
|
윤백남프로덕션 |
3 |
장한몽 |
〃 |
출연 |
|
계림영화협회 |
4 |
농중조 |
〃 |
출연[공정삼] |
번안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5 |
아리랑 |
〃 |
원작 각색 감독 주연 |
나운규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6 |
풍운아 |
〃 |
각색 감독 편집 주연 |
나운규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7 |
야서 |
1927 |
원작 각색 감독 편집 주연 |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8 |
흑과 백 |
〃 |
출연[취한낙삼] |
|
김택윤프로덕션 |
9 |
금붕어 |
〃 |
각색 감독 주연 |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10 |
잘있거라 |
〃 |
원작 각색 감독 출연[경호] |
|
나운규프로덕션 |
|
먼동이 틀때 |
〃 |
출연 |
|
계림영화협회 |
11 |
옥녀 |
1928 |
원작 각색 감독 편집 출연 |
|
나운규프로덕션 |
12 |
사랑을 찾아서 |
〃 |
원작 각색 감독 편집 주연 |
|
나운규프로덕션 |
13 |
사나이 |
〃 |
각색 감독 출연[이태식] |
|
나운규프로덕션 |
14 |
벙어리 삼룡 |
1929 |
각색 감독 편집 주연 |
|
나운규프로덕션 |
15 |
아리랑 후편 |
1930 |
원작 각색 감독 주연 |
|
원방각 |
16 |
철인도 |
〃 |
각색 감독 편집 주연 |
|
원방각 |
17 |
금강한 |
1931 |
각색 주연 |
|
원산만프로덕션 |
18 |
남편은 경비대로 |
〃 |
주연 |
|
원산만프로덕션 |
|
룸펜은 어디로 |
〃 |
출연 |
|
도요야마 미츠루
프로덕션 |
|
십년 |
〃 |
각색 감독 주연각색 감독 주연 |
|
|
19 |
개화당 이문 |
1932 |
감독 출연 |
|
원산만프로덕션 |
|
홍길동[연쇄극) |
〃 |
감독 |
|
|
|
신라노[연쇄극] |
〃 |
원작 감독 |
|
|
20 |
임자없는 나룻배 |
〃 |
원작 주연 |
|
유신키네마주식회사 |
21 |
종로 |
〃 |
원작 각색 출연 |
|
대구영화촬영소 |
|
암굴왕[연쇄극] |
〃 |
감독 번안각색 주연 |
|
|
|
장화홍련전 |
1933 |
각본 감독 출연 |
|
|
|
내가 죽인 여자 [연쇄극] |
〃 |
각본 감독 주연 |
|
신무대극단 |
|
향토민요극 아리랑 [연쇄극] |
〃 |
|
각본 감독 주연 |
신무대극단 |
|
총성[연쇄극] |
〃 |
각본 감독 |
|
신무대극단 |
22 |
칠번통 소사건 |
〃 |
1934 |
원작 각색 감독 주연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23 |
무화과 |
1935 |
감독 편집 주연[홍인식] |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24 |
강건너 마을 |
〃 |
원작 각색 편집 감독 |
|
한양영화사 |
25 |
그림자 |
〃 |
각색 감독 출연 |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26 |
아리랑 제3편 |
1936 |
원작 각색 감독 출연 |
|
한양영화사 |
27 |
오몽녀 |
〃 |
원작 감독 |
|
경성촬영소 |
원작: 9편 원작 감독:6편 각색:14편 감독;15편 출연;24편 |
극장 단성사
단성사(1943~1946, 대륙극장)에서는 여러 편의 영화를 개봉하였다. 나운규 감독·주연의 무성영화 《아리랑(1926)》제1편, 《아리랑, 그 후 이야기(1929)》제2편, 발성영화《말문 연 아리랑(1936)》제3편이 차례대로 개봉되었다. 해방 후 1950년대에 들어서는 홍개명 감독의 발성영화 《아리랑 고개(1936)》가 개봉되었다.
《아리랑》제1편에 대한 오마주(Hommage/respect)로 작품을 리메이크하거나 나운규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1957)》, 최무룡 감독의 《아리랑, 나운규의 일생(1966)》, 유현목 감독의 《아리랑(1968)》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무엇보다 192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과 같은 민족영화가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확립된 시기로 《아리랑》은 항일 저항정신을 집약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민중은 이 작품에 열광하여 나라 잃은 겨레의 울분을 풀었으며, 마치 ‘아리랑’은 애국가처럼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극장 단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