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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이야기

문학과 아리랑

문학과 아리랑

<아리랑> 사설의 의미 확대는
곧 문학작품

 

민요 아리랑은 사설·기능·선율,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장르성이 발휘된다. 그런데 특히 이 시기 주제가<아리랑> 사설의 의미 확대는 곧 문학작품임으로, 그 장르성이 ‘노래 아리랑’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장르에 전승과 변화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기록하였으니, 민요시·동요·소설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최영한(崔永翰)은 1932년 5월 잡지 《東光》의 〈조선민요론>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선에서 가장 조선 정조를 잘 표현한 문학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민요일 것이다. 조선 문학의 정화이며 조선 시가의 원류이다”

1930년대 조선은 전국적으로 음악 시장이 활성화되던 시기다.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 등의 교육 현장에서 서양음악이 보편화되었으며, 음반과 대중공연을 통해 일본 음악이 일반화되었다. 권번의 활성화로 전통 음악 공연도 열렸고, 극장과 카페 등의 유흥업소를 통해 음악 활동이 성행했다.

이 시기 북간도에서 활동한 최영한은 전통 음악의 기반이 되는 민요를 지키고 연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위와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외래 음악의 유입으로 전통 음악이 위축되거나 사라져가는 현상을 경계한 것이다. 또한 그의 직업이 문학평론가라는 점에서 민요의 사설을 문학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민요 아리랑은 사설·기능·선율,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장르성이 발휘된다. 특히 이 시기 주제가 〈아리랑〉의 사설은 문학 작품으로 그 의미를 확대할 수 있다. 시인들은 조선의 정서를 주목하였다.

“최근 문단에서도 민요 작가들이 ‘아리랑’ 같은 것을 시작하는 듯하다. 잡지 신문에 종종 게재된 것을 보았으며…(중략) 민요 변천의 형식에 의하여 ‘리듬’과 ‘음향’, 후렴 같은 것은 고유의 것을 인용하고 알맹이만 작가의 창작에 의존하여 현대인의 취향에 적합하게 변용하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영한이 기록한 1930년대 당시 문단의 상황이다.

1920년대 들어 창작이 되고, 시제(詩題)에서 ‘아리랑’을 선정하여 시행에서 2행의 여음을 쓰는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억·김소월·김동환·홍사용 등이 잡지 《개벽》, 《동광》, 《별건곤》과 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통해 발표하면서 그 장르명과 유형이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는 김동환(金東煥/1901~1950)의 <아리랑고개>가 있다.

 아리랑고개(俗謠)

천- 리 천- 리 삼천리에
그립든 동무가 모와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어서 넘자(각 연 반복)

서울-장안엔 술집도 만타
불평-품으니 느는게지


꽃이- 안폇다 죽은나문가
뿌리는 살앗네 꽃피겟지


약산-동대의 진달래꼿도
한폭이 먼저피면 따라피네


삼각산 넘나드는 청제비봐라
정성만 잇으면 어딀못넘어
   

  • 3인 시가집(삼천리사, 김동환, 이광수, 주요한)3인 시가집(삼천리사, 김동환, 이광수, 주요한)
  • 김동환의 <아리랑 고개>1김동환의 <아리랑 고개>1
  • 김동환의 <아리랑 고개>2김동환의 <아리랑 고개>2

이 작품은 1929년에 발표되어 《三人詩歌集》에 수록되었다. 임동권의 《한국민요집》에는 서울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요로,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과 유행가집 《신식낙화유수창가집》에는 작가 표기 없이 수록되어 널리 애송되었다.

아리랑 문화의 주맥(主脈)은 민요(신민요) 또는 노래(대중음악)이다. 그리고 이를 확장한 가장 뚜렷한 지맥(支脈)은 문학이다. ‘아리랑’은 언어를 표현 매체로 하는 작품이며 예술이기에 아리랑의 사설을 문학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민요시(民謠詩)가 다양하게 출현하여 구연이 아닌 활자매체 기록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민중의 노래, 신민요 〈아리랑〉

경성제국대학에서 민요를 전공한 고정옥(高晶玉/1911~1969)은 신민요를 ‘시인 자신의 개성을 죽이고 민요의 정신에 입각해 널리 민중에게 불리기 위해 지은 노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의 노래였던 신민요가 민족성을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총독부는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 일례로 1934년 조선방송협회(JODK/경성방송)의 제2조선어 방송에서는 신민요를 모집하며, “종래 조선민요는 애조를 띠는 것이 많아서 민족 발전상에 큰 영향이 있으므로 이번 신민요는 특히 그 점을 피해야 한다.”고 그 목적을 적시했다.

민요시 출현에 이어 시, 시조, 한시, 가사(歌辭) 작품이 발표되었고, 소설, 수필 등 산문 작품들도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화소설 <아리랑> 1편, 박a문서관, 문일 편영화소설 <아리랑> 1편, 박문서관, 문일 편